오래전 오류동 도로변에 있는 영등포교도소에서였다. 메마른 금속음이 들리는 녹슨 철문을 통과 해서 들어가면 우중충한 장방형의 낡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입구 광장의 왼쪽 끝에 축사 같은 길다란 건물이 스산한 느낌을 풍기면서 웅크리고 있었다. 늙은 교도관 한명이 담당하는 변호인 접견실이었다. 나는 흉악범인 강도와 마주 앉아 있었다.당시는 CCTV도 없었고 갑작스런 흉악범의 공격에서 나를 지켜줄 철창이나 칸막이도 없었다. 교도관도 둘을 놔두고 어딘가 가버렸다. 흉악범인 그가 나를 보자마자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공소사실중 강도죄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는 스산한 겨울 풍경을 담고 굽이굽이 휘어지는 산길을 달렸다. 차창으로 햇빛에 반사되는 얼어붙은 강이 보였고 서걱대는 마른 갈대가 지나가기도 했다.장과 내가 버스에서 내렸을 때 주변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했다. 마을 입구의 작은 가게의 알전구만이 주변의 어둠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장과 나는 가게에 들어가 양초를 사서 헌 신문지로 똘똘 말았다. 거기에 불을 붙이면 산길을 밝힐 간이횃불이 됐다. 우리는 산 짐승 소리가 멀리 들리는 눈 덮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장과 나는 장학재단에서 일 년간 고시공부를
식물인간이 된 노인의 병실로 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노인은 의사고 믿음이 깊은 분이었다. 진료하고 기도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게 생활의 전부였다. 침대 옆에 있던 그 노인의 늙은 부인이 이런 말을 했다.“이 양반이 진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어요. 응급실로 갔는데 뇌 촬영을 한 의사들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어요. 원인 모르게 소뇌에서 갑자기 피가 박카스병 하나 정도 나왔대요. 특히 소뇌 쪽은 수술이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바로 수술을 해서 생명은 건졌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13년간 식물인간으로 있으면서 나이 팔십을 맞이했네
탤런트 송승환 씨가 눈이 안 좋다는 기사를 봤다. 시력을 많이 잃었는데도 여전히 무대에 서고 방송일을 계속하고 있다. 주변의 우려에 대해 그는 “안 보여도 형체는 알아볼 수 있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한다. 안 보이면 열심히 들으면서 하면 된다”고 했다. 대단한 집념이 엿보인다. 성실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게 그에 대한 평가였다.나도 눈이 상해 보니까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도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녹내장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시야가 극도로 좁아져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다른 쪽 눈이 남아있다
오래전 드라마에서 주인공이었던 여성 탤런트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우수가 낀 듯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간간이 단역으로 나오는 것 같다. 그녀의 얼굴에서 기억의 아스라한 저편에 있던 한 남자의 희미한 형체가 떠올라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그러니까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던 가을 어느 날이었다. 나는 구치소에서 그를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접견실로 나온 그는 어깨 위로 온통 인공혈관을 걸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피를 걸러줘야 한다고 했다.“예리한 면도날로 온몸을 얇게 써는 것 같이 아파요”그는 내게 고통을 호소했다.
변호사를 하면서 이름이 알려진 내 나이 또래의 조직폭력의 두목급들을 여러 명 만났다. 그들의 과거 얘기를 들어보면 요즈음 중고등학교 일진 아이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어려서부터 싸움 선수들인 것 같았다.서방파 두목으로 전설적인 이름을 날리던 김태촌씨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싸움을 잘하기 위해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리고 깡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 극기 훈련을 했다고 했다. 우리 세대도 어려서부터 주먹을 쓰는 친구도 있었고 공부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인생의 방향이라고 할까.드라마 모래시계에 나오는 조폭 두목의 모델로 알려진 사람도 서방파의
중학교 입시를 치르고 났을 때였다. 초등학교 육학년 일 년 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이런 말을 해 주었다.“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든 될 거다”가볍게 칭찬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의 얼굴 표정은 판결을 선고하는 법관같이 진지해 보였다. 그 말씀이 나의 영혼에 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그 씨가 내 마음 밭에서 싹이 되어 나오면서 나의 용기와 믿음이 되었다.고등학교 시절 사법고시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한 해에 다섯 명을 뽑은 적도 있고 보통은 삼십 명 정도가 합격하는 대한민국에서 가
천구백 칠십칠년 일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얗게 눈이 덮인 가야산 원당암의 새벽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둔탁하고 묵직한 목탁 소리가 몇 번을 울렸다. 아침 공양을 하라는 소리였다.나는 청계천시장에서 산 얇은 싸구려 이불을 덮고 방 안에 가득 찬 냉기를 견디고 있었다. 방안이나 밖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지난 저녁 장작 세 가치를 땐 온돌방은 식어 있었다. 간신히 일어나 암자 뒤쪽에 달아맨 창고 같은 어둠침침한 방으로 갔다.베니어를 잘라 만든 길다란 사각의 상 위에 음식이 담긴 몇 개의 양재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밀쌀을
어려서 부터 알던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나 간암이래. 의사 말이 간 이식수술을 해야 할 것 같대. 기도해줘”그의 어조에서 죽음 앞의 간절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간을 제공할 사람이 있는 거야?”“딸이 간을 내놓겠다고 하는데 애비로서 할 짓인가 싶어”그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애잔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동네 친구였다. 일 년에 몇 번씩 만나 밥을 먹었는데 우정이 이어져 오는 셈이었다.그는 열심히 돈을 벌고 절약하면서 부자가 됐다. 그러나 생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속의 장기가 탈이 나면 죽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내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봤다.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야심에 불타 몇몇 인물들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단지 야심만으로 쿠데타가 가능할까. 당시 그들은 정의와 국가의 안전을 내세웠다. 그것도 다 믿지 않는다. 명분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된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이학봉씨가 살아있을 때 그가 털어놓는 속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박정희 대통령이 총애하면서 키운 심복의 장교그룹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스가 아니라 거의 아버지 수
먼 친척 한 사람이 노숙자가 됐다고 한다. 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평생 건설회사에 다니던 성실한 사람이었다. 퇴직을 하고 자기 방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더니 어느 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를 을지로역 앞에서 봤다고 했다.형제들이 그를 찾으러 갔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다음날 사라졌다고 했다.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영혼의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선 건 아니었을까.캐나다 토론토시의 새벽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서 띄엄띄엄 자고있는 노숙자들을 봤었다. 슬리핑 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는 옆에는 지난밤에 읽다가 만 작
다섯달 동안 집을 수리하면서 매일 노동하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젊은 러시아인 일용잡부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끊임없이 쓰레기를 나르고 벽돌을 옮겼다. 잠시 쉬는 시간은 핸드폰을 들고 가족과 연락하는 것 같았다.그는 밥벌이를 위해서 먼 나라로 왔다. 나는 저녁에 그에게 품값을 주었다. 그는 감사하게 받았다. 그의 노동이 가족에게 감사한 밥이 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밥벌이 앞에서 양순했다.조적공 영감은 반쯤 잘려진 녹슨 드럼통 안에서 시멘트와 물을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반죽이 부드러워지기를 완강히 거부 할 때가 있다. 반죽기를 잡은
서가를 정리하다가 소설가 최인호씨가 수덕사에 묵으면서 쓴 에세이집을 발견했다. 그가 죽기 몇 년 전 쓴 글 같았다. 아마도 암이 발견되기 전이었을 것이다. 투병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곧 닥쳐올 노년기에 내가 심술궂은 늙은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는 것이 내 소망이다. 무엇에나 올바른 소리 하나쯤 해야 한다고 나서는 그런 주책없는 늙은이, 위로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체의 고통을 호소하는 그런 늙은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하나 더 바란
다섯 달에 걸친 집짓기가 끝이 났다. 낡은 집을 사서 지붕과 벽체만 남기고 다시 지은 셈이다. 일용잡부와 함께 직접 벽지들을 뜯고 쓰레기를 치웠다. 조적공, 배관공, 타일공, 전기공, 온돌놓는 사람들을 인력센터에서 직접 불러 함께 일을 했다.시멘트부터 벽돌부터 전등까지 직접 사러 다녔다. 하나하나 유튜브로 배우면서 처음 한 일이라 애를 많이 먹었다.나이 칠십 가까운 아내도 완전히 속칭 노가다가 됐다. 나는 요즈음 완성된 빈 집에 가서 매일 청소포로 집 전체를 깨끗이 닦는다. 내 손길이 어느 한 부분도 빠진 곳이 없이 닿게 하려고 한
내가 열살무렵이었다. 동네 골목길에 작은 빵집이 있었다. 빵집 주변은 고소하고 달콤한 공기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냄새에 잡혀 맑고 투명한 진열장을 통해 빵집 주인이 팥빵을 만드는 걸 구경하곤 했다.빵집 주인은 노릇노릇하게 갓 구워진 빵에 붓으로 달걀의 노른자를 바르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빵에서 반짝거리는 윤기가 났다.갓 구워진 빵을 하나 얻어먹을 때 나는 행복했다. 녹을 듯 부드러운 껍질을 한입 베어 물면 열기가 남아있는 ‘앙꼬’의 상큼한 단맛과 향기가 은은하게 입속에 퍼졌다.중학 입시에서 합격했을 때 엄마는 내게 소원을 물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법정에서 판사가 선고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온 변호사였다. 지난 십년 동안 부부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게 모두 끝나는 순간이었다. 부인이었던 사람이 먼저 나가고 나는 가방을 챙겨서 남편과 그 법정을 나왔다. 법원 복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제는 남이 된 여자를 보았다.“잠깐만요”내가 여자를 불렀다.“이제는 모든 싸움이 끝나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됐습니다. 이별의 순간 마지막 인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악수라도 하고 헤어지시는 게 어떨지.”결혼생활의 막이 내렸다. 치열한 권투경기에서도
점심때 동해시의 작은 소머리국밥집에 갔다. 우연히 거기서 같은 실버타운에 있는 아흔다섯 살의 노인을 봤다. 간병인과 함께 국밥을 먹고 있었다. 모처럼 외식을 하러 나들이를 하러 온 것 같았다. 말이 없으면서도 환하고 밝은 미소가 아름다운 노인이었다. 마음도 넉넉해 보였다.혼자 살면서 생일에는 떡 한 덩어리라도 다른 노인들에게 돌렸다. 나는 갑자기 그 노인에게 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올 때 카운터에서 그 노인과 간병인의 밥값을 조용히 치렀다. 기분이 좋았다.가난했던 소년 시절 친구들한테서 짜장면이나 곰탕같은 걸 자주
화면 속에서 평론가 김갑수씨가 신랄하게 부패한 교회의 행태들을 질타하고 있었다. 성경의 과학적 역사적 증명의 결여와 논리적 헛점을 지적했다.영혼이 없는 좀비가 되어 목사를 숭배하는 신도들을 말했다. 그리고 그런 부패를 외면하고 자기만 깨끗하면 되는 것 같이 행동하는 다른 교회와 교인들의 비겁성을 직선적으로 말하고 있었다.논쟁의 상대방인 고도원씨가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성경을 열심히 말하고 있지만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옆에 있는 목사도 거의 말이 없었다. 지성적인 김갑수씨의 말중에 틀린 게 없는 것 같았다.변호사인 나는 교회
결혼을 앞둔 삼십대 남성이 글을 보내왔다. 누구와 결혼해서 어떻게 살지 고민이라고 했다. 예뻤으면 좋겠고 집안도 학벌도 직업도 좋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결혼관이 궁금하다고 했다.정말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관념이나 추상이 아닌 내 경험을 조심해서 말해 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십년이 넘는 기간 결혼생활을 하고 또 변호사로 수많은 이혼소송을 하면서 그들이 금이 가고 깨지는 모습을 보았다.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재벌집 사위로 들어가 후계자가 되는 설정이 더러 나온다. 우리 사회에서 신데렐라 같
“깍두기공책에 시편 23장을 한번 쓰는 데 천원 주마”초등학교 사학년인 손자와 계약을 맺었다. 엄지 도장을 찍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수고하고 받는 돈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상을 심어주려는 할아버지의 의도다. 나는 손자에게 요즈음 내가 시편 23장을 쓰고 있는 공책을 샘플로 보여주면서 덧붙였다.“한 글자 한 글자 할아버지가 쓴 것 같이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대충 쓰면 불량제품이니까 돈을 안 줄거야.”“알았어요, 할아버지 학교 쉬는 시간에 써 볼께요.”손자의 얼굴에 의지가 떠올랐다. 나는 동기유발을 위해 상을 하나 더